[더뉴스=김도형 작가] 개인의 다양성을 말살 당하며 중・고등학교를 보냈던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밖에 볼 수 없는 교복과 모자, 그리고 짧은 머리를 강요당했었다 그런 의미로 난 지금의 교복도 반대한다. 등교시간.'바리깡' 을 들고 서있는 선생님.머리카락이 좀 길다 싶은 학생을 붙잡곤 바리깡으로 앞머리부터 밀기 시작한다.금새 고속도로가 생겨버린다 떨어지는 머리카락은 규율이란 이름아래 철저히 짓밟히는 개인의 자아였다 그 짧은 '이부' 머리속엔 여름이면 비듬이 동전만해졌고 동네마다 황소표 바리
이 밧줄 끝에는 소중한 생명이 매달려 있습니다한가정의 가장, 소중한 누군가의 가족이 그 생명의 존재입니다밧줄에 삶을 맡기는 그의 시간들은 그래서 숭고 합니다 음악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밧줄을 끊어버린 몸서리 처지는 극악무도한 일이 얼마전 일어났는데 서울 반포의 한 건설현장에서 또다시 누군가의 고의적인 밧줄 절단 사건으로 한 소중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론 치안이 꽤 안정적인 나라입니다밤늦게까지 거리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인권존중, 생명존중이란 척도를 들이대면
1986년도에 대학을 입학했다요즘 청년들은 영화로나 어렴풋이 알 수 있을듯한 바로 그 격동의 시기였다 대학가는 연일 최루탄 연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지만 젊은 영혼들은 나름대로 대학생활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내겐 대학생이 되었다는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거의 매일 행하던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학교 정문앞 통나무라는 학사주점을 가는 것이다.막걸리 주전자에 소주가 한 병 부어지고 그렇게 '쏘막'은 지갑이 가벼운 청춘들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었다 취기가 오르면 몸살을 앓아야 하는건 양은으로 된 막걸리잔 들이었다젓가락 장단
[더뉴스=김도형 작가]몇년전 이야기입니다친하게 지내는 후배가 문득문득 찿아와서소주 한잔을 나누곤 했습니다.그때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 "아따! 행님! 제가 그리 갈라요"진국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후배의 전화가 왔습니다무조건 갈테니 얼굴 한번 보자는 거였어요이 후배가 워낙 넉살이 좋아 난 최면에 걸린듯"그... 그래 와라"이렇게 대답을 했지요 "거 행님! 전에 그기 안있소? 그 약국 앞에 서 있으소, 나가 택시비가 없어서라""그... 그래" 혼자도 아니고 처음 보는 인간도 한명 데리고 왔더군요두 녀석이 택시비도 없다니.
[더뉴스=김도형 작가] 오랫만의 마도로스 시절 이야기이다난 부산 해기사라는 곳에서 2주간의 교육을 받고 싱가폴에 있는 한 선박을 향해 비행기를 타고 갔다 나의 개인물품보다는 그 선박에 전해줘야 할 짐이 더 많았지만 공짜티켓 이라는 달콤함은 가방하나 추가쯤이야 그까이꺼! 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내 첫 보직은 주방장보조였다다른 선원들보다 두시간정도 먼저 기상해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장을 도와주고, 설거지며 잡다한 일들을 한 후 잠시 쉰다 점심을 또 준비하고 아침과 같은 일을 한 후 또 잠시 쉰다저녁을 준비하고 점심과 같은 일을 한후
[더뉴스=김도형 작가] 머리를 살짝 짧게 잘랐다샤워를 하며 거울을 보니 긴 머리카락이 가렸었던살짝 패인 이마위의 상처자국이 보였다어릴 때만해도 꽤 깊던 상처자국마저 세월 앞에선 희미해져간다그러나 이 상처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해도 엷어지지가 않는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였다고 한다당시 아이들이 한번씩은 앓아야했던 홍역이 내게도 찾아왔고 고열과 온몸을 덮는 홍반도 함께였었다이 홍반은 지독한 가려움도 동반했는데 손톱으로 긁어버리면 곰보자국이 남아버리게 된다 손자의 고열이 사그러 지기까지 몇날며칠을 할머니께서는 밤을 새워 손자의
[더뉴스=김도형 작가] 고등학교 1학년인가? 아니면 중학생 시절 이었던가가느다란 기억력이 아쉽기는 하지만 하여간 그맘때쯤이었다생물 선생님의 지도 아래 우린 해부실습을 하기 시작했다흰색 모르모트는 실험대위에서 팔자로 누워있었고몇 명씩 한조를 이루어 칠판에 적힌 순서를 따라마치 의사가 된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며 메쓰를 들었다여기저기서 부주의한 솜씨로 건드리지 말라는 내장부위를 건드리기 시작했고 생물실은 곧 작은 생명의 마지막 비명같은 비린내로 가득 채워졌다선생님께서는 각 실험대를 돌아다니며여러가지 설명과 미흡한 부분에 대해선 첨삭지도를
9호선 열차가 고속터미널역에 정차한다환승을 위해 내려야하기에 출입문 앞에 섰다서행하던 기차의 문에 붙은 창문이 역사의 스크린도어 앞에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을 파노라마로 보여준다.드디어 멈추는 열차(기차라고 했다가 열차라고 했다가 하는것은 열차라고만 쓰면 기차가 맘이 상할것 같고 기차라고만 쓰면 열차가 삐뚤어질테닷! 이럴까봐여서... 전철, 지하철도 같은 맥락으로 혼용하는 난 극소심일까? 오랜만에 글이 샜다 즐겁다)오오!?스크린도어의 중앙부분과 기차 출입문이 정확히 일치한다!한번도, 단 한번도 내게 허락되어지지 않았던 칼맞춤의 광경이
고등학교때백일장이란 행사가 있었더랬다내겐 꽤나 즐거운 행사로 기억되어 지는건 대충 몇 자 적어내면 최소 우수상, 신경 좀 써서 단어를 고르기라도 하면 최우수상겨울방학을 앞둔 덕수궁에서의 백일장에선 그래서인가 찬바람에 손이시려도 깔끔하게 수필하나를 써냈다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최우수상을 받았더랬다이 감수성 쩔던 시대가 내 글인생의 황금기였으리라이젠 단어하나 토씨하나 선택하는데도 추석귀향길마냥 사고의 도로가 막힌다그래서 이렇게 더듬더듬 예전 순수가 아직 날 놓아주지 않았던 때를 그리워해본다당시 던져진 글감은 몇가지였었는데내가 선택한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 이었다여동생을 엎드리게 하고는 등을 밟고 올라선다나는 엄마가 서랍장위에 작은 냄비를 소중히 올려놓는걸 주의깊게 보았었고그안의 내용물이 몹시도 궁금했던 것이다조심조심 꺼내놓은 냄비위에는 신문지가 덮어져 있었고 까만색 고무줄로 묶여있었다이건 필시 먹는게 분명했다십년도 안 살아온 삶이지만 고추장을 담글때엿질금을 달이던 할머니의 주걱에서 한모금 얻어먹었던 달콤했던 기억도 이 냄비속의 내용물이 달디 단 먹거리란 확신이 들게했다손가락으로 쿡 찍어 쪽쪽 빨았다화끈한게 보통맛이 아니었다화끈거림은 곧 통증으로 이어졌고 겁에
12대 장손으로 태어난 덕분에 초등학교 때부터 음복주로 술을 배웠다주먹만한 녀석이 술에 취해 홍알대는 모습이 웃겨서 더 먹인듯하다엄청나진 않지만 주량도 제법된다술 마시면 지갑을 잘 여는 것 외엔 특이한 술버릇도 없다그래서 얻은 별명이 마르지 않는 지갑 이었다자랑할 것 한가지는 난 오늘 마셔야할 나의 마지막잔을 안다그 마지막 잔이 비워지면... 집에 간다페친의 담벼락에 최고급 사케와 함께하는불금의 사진이 올라온다땡긴다쌀로 빚은 일본 정통주 사케는쌀을 얼마나 깍아내었는가로(도정)그 급이 나뉜다일본인들도 비싸서 자주 못마신다는 쿠보타 만
밤 11시에 걸려온 전화는 모르는 번호였다받아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끝에 수신버튼을 누르자대뜸 욕이 튀어나왔다쌍느므시키!나와라 당장!십여년만에 지금은 수원에 사는 어릴적 동네친구 '깜시'가 전화를 한거였다반가운 마음에 집근처에 와있다는 곳으로 나가보니또한 십수년 만에 만나는 '용가리'도 같이 있었다도씨! 오랫만이다내별명은 그저 이름에 도자가 있다는 이유로 도씨였다그렇게 우린 늦은밤 어릴적 별명을 불러대며 소주잔을 기울였다곧 한가위 명절이 다가오는데 친구들 얼굴이 갑자기 보고 싶더라는 깜시가 늦은 밤,
소녀가 우리집에 온것은한참 더울 때 였어요이제 막 중학생이 된 나는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서,아니 안기다시피 걸어오는소녀에게서 이질감을 느끼고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어요뇌성마비1급 장애․․․․나보다 한살어린 소녀는태어날 때부터 제대로 서지도 못했으며안녕이라는 인사 한마디를 하는데온힘을 다 써야하는 삶을 살았지요할아버지의 처남․․․․ 그러니까 할머니의오빠 되시는 분의 손녀딸 이었어요"이만저만해서 우리 집에서 며칠 지낼거다"소녀는 방학을 맞이한 우리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어느날 부자집 주인이 여행을 가는데 이것저것 많은 짐들을 머슴들에게 들고 가도록 했다다들 작은 짐들을 들고 가려고 하는데 한 머슴은 아무도 들려고 하지 않은 크나큰 짐을 흔쾌히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그 큰 짐은 여행하는 동안 먹을 빵이었고 결국 되돌아올때 그 머슴은 빈손으로 가볍게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대학교 때 내려간 친구 아버님의 고향엔 논밭일이 한참 이었다좀 도와는 드려야겠는데 만만해 보이는 일이 없었다그나마 등에 백팩 처럼 매는 농약살포기가 할만해 보였고 친구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뒤로 하고 그 무
동네 친구가 알바를 시작했다분식집 배달일이었다한 달 정도인가가 지나고 방학을 맞은 내게 넌지시자신의 일을 물려주겠다는 뜻의 말을 했다"주인아저씨 아줌마도 잘해주시고 일도 힘든건 크게 없고..."크게 힘든일이 없다는건 작게 힘든 일은 많다는사실을 모를리 없었지만 난 일거리가 필요했고흔쾌히 친구가 관둘 그자리를 대신 하기로했다갑자기 그만두면 알바가 대신할 사람을 구해야한다는책임감으로서의 행위가 내게 행해졌던거였다영등포구 당산동에 위치했던 코끼리 분식..처음 일을 하러간 날 주인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며왜 간판이 코끼리분식인지 알 수 있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립니다워낙 조용한 주택가라서 나를 깨우기 위한 알람이 이웃도 깨울까봐 황급히 일어나 꺼야합니다다섯시 이십분 이른 아침이 각성하지 못한 육체를 무겁게 합니다만 ‘십분만 더’ 를 실행했다간 자칫 지각을 면할 수 없기에 애써 눈을 비비며 일어납니다오늘의 첫 알림입니다단골 편의점에서 캔커피와 담배를 삽니다밤을 꼬박 지새우며 일을 했을 알바는 내가 피우는 담배를 알고있습니다어떨때는 담배가 많이 남아 안사려고 하는데도 쓱 내밀어서 그냥 사기도 할 정도입니다그만의 친근감의 표현이겠지요카드로 계산을 마치자 문자가 옵니다결제금
아내와 신혼초기에 외식을 하러 간적이 있었습니다고깃집이었는데 고기에 대해서는 나의 혀가 영 둔감해서 외식을 할때면 고기냐 아니냐로 갈등을 좀 빚고는 했습니다나는 아무래도 해산물쪽이 입맛에 맞는편이었고아내는 오로지 고기였거든요(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이라던데 흉보기는 뭘까요?슬슬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이왕 빼는 칼 흉보기 이제부터 시작입니다)고깃집에 앉자마자 아줌마를 연신 불러댑니다아내의 말투엔 가시가 돋은 듯 묘하게도 날카롭게 들립니다.자꾸 재촉을 해대며 채근을 합니다슬슬 오늘 내가 뭘 잘못했나 머릿속을 굴려봅니다만도통 아내의 행동을
나는 87년도에 군대생활을 했습니다.방위복무를 하게됩니다수송사령부 예하부대 영등포 TMO란곳이었지요당시 영등포역은 신 역사 건축 중이었고그래서 역 주변은 상당히 어수선 했었지요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노숙인들로 우리 TMO사무실앞은 그야말로 장사진 이었습니다노숙인들도 나름 서열이 있어서 일반인들에게 구걸을 하면 소주, 과자 등을 사서 고참에게 상납도 하더군요그 노숙인중에 누가봐도 병색이 짙은 남자가 한명 있었는데 그 남자에겐 초등학교 일학년 정도의 딸이 있었지요노숙인 서열로 치면 신입에 불과한 이 남자는어린나이에 거리로 나 앉아 세
아버님께서는 날 도형이라고 부른다.23년전 당신의 귀한 딸을 2인분 만들어놨으니 알아서 하십시오 라고 시건방을 떨던 내게 사위도 자식이라면서가슴에 품겠다는 말씀과 함께 바로 내이름을 부르셨고지금도 전화라도 드리면 "허허 도형아 잘지내쟈? 날 더분데 건강 잘 챙기고 알았제?" 이렇게 내 걱정을 먼저 하신다 못난 아들이다아버님은 하시던 세탁소를 정리하시고 장유에 이사 가신후 지금 아파트 경비반장을 하고 계신다.경남 장유도 더위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동네인데이 한여름 선풍기 한대로 무더위와 대결을 하시고 계실것이 뻔하다그러나 난 당연
금강 유원지를 향해 걸어가던 뙤약볕 아래의 시골길은나의 아집 덕분에 더 무더웠다 영동에서는 목적지인 수동리까지 버스가 하루 두번 운행했지만지도를 펼쳐본 나는 옥천이 거리상 더 가까운것을 괜히 보았고친구들의 질책을 감수하며 1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를 걸어야했다 옥천 버스터미널에서 수동리가는 버스가 없다는 말에 흐르던 땀마저도 차갑게 식었었다 이 여행은 나와, 친구들의 군입대전 마지막 여행이 될터였다.그런데 처음부터 꼬였다매미는 눈치없이 울어댔다친구들에게는 ‘맴맴’으로 들렸을 소리가 내겐 ‘바보바보’ 이렇게 들렸다 허리까지나 겨우 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