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뉴스=THE NEWS ] 고구려 개국공신은 7명이다. 오미, 마려, 협보, 부분노 등 4명은 추모왕이 동부여를 탈출할 때 처음부터 동행하며, 재사, 무골, 묵거 등 3명은 중간에 합류한다. 특히 『고구려사략』은 이들을 ‘四豪三賢’ 즉 ‘4명의 호걸과 3명의 현자’로 표기한다.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인물들이다.고구려에서 쫓겨난 협보‘四豪’의 한 사람인 협보(陜父)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협보는 유리왕에게 직언을 했다가 파면되어 고구려에서 쫓겨난다. 때는 국내 위나암성으로 천도한 직후인 3년(유리2
[더뉴스=정재수 역사작가] 고구려 초기 도읍 중 유리왕이 천도한 위나암성(尉那巖城)은 소재지 자체가 불분명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일제 식민사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길림성 집안현의 평지성 통구성을 국내성으로, 바로 위쪽의 산성자산의 산성을 위나암성을 비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훗날 산상왕(10대)이 천도한 환도성(丸都城) 또한 동일 장소로 비정하여 위나암성이 환도성을 겸하는 웃지 못 할 역사가 만들어 진다. 또한 우리는 이를 강요받고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길림성 집안현의 산성자산을 환도산으로 이름을 고친다.
[더뉴스=정재수 역사작가] 유리왕(2대)의 대표 상품은 ‘황조가(黃鳥歌)’이다. ‘훨훨 나는 저 꾀꼬리(翩翩黃鳥) 암수 서로 정답구나(雌雄相依) 외로워라 이 내 몸은(念我之獨) 뉘와 함께 돌아갈꼬(誰其與歸)’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인 황조가는 화희(禾姬-골천출신)와 치희(雉姬-한족출신) 두 후궁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유리왕의 애달픈 심정이 잘 녹아있다.▶황조가는 고구려 초기 정치세력간의 권력충돌을 배경으로 한다. 화희(골천 출신)와 치희(한족 출신)의 다툼은 토착세력과 외래세력간의 권력싸움이다. 황조가는 왕권을 강화시키려다 좌절한
[더뉴스=THE NEWS] 『삼국사기』 건국신화를 보면 추모왕의 생모 유화부인은 화백(河伯)의 딸로 나온다. 하백은 ‘수신(水神-물의 신)’을 가리킨다. 수신은 여성적 생산력의 상징으로 천신(天神)인 남성과 결합하는 형태로 신화체계가 만들어진다. 추모왕은 자칭(自稱) 해모수라 칭한 북부여 왕족출신 옥저후 불리지(弗離支)와 하백의 딸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다.하백, 곤연지역 씨족장 옥두진『유기추모경』에 유화부인의 가계가 나온다. 아버지는 곤연(鯤淵)의 씨족장인 청하백(淸河伯) 옥두진(屋斗辰)이다. 『삼국사기』의 하백은 청하백을 말한
[더뉴스=정재수 역사작가] 어느 나라든지 건국초기 최대 목표는 영토 확장이다. 일정한 땅을 확보하지 않으면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영토 확장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군사적 정복활동을 동반하는 하드(hard)적 방법이며, 또 하나는 혼인 등을 통해 결합하는 소프트(soft)적 방법이다. 고구려는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여 영토 확장을 꾀한다. 소프트적 방법의 대표적인 경우는 홀본국 출신의 소서노와의 혼인이다. 추모왕은 소서노와의 혼인을 통해 홀본국을 모체로 고구려를 건국한다.당시 대륙 동북방은 북부여가 와해되며 연맹체를 구
[더뉴스=정재수 역사작가] 시조 주몽을 『삼국사기』는 ‘동명성왕(東明聖王)’, 《광개토왕릉비》는 ‘추모왕(鄒牟王)’으로 쓴다. 동명성왕이 추모왕이다. 추모는 고구려 시조에게만 붙여진 특별 왕호이다. 흉노의 왕호 선우(單于)와 같으며, 둘 다 ‘천자(天子)’의 뜻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추모는 신(神)으로 여김이며 선우는 하늘(天)로 여김이다. 추모왕은 고구려 시조의 왕호가 이름으로 변화한 경우이다. 동명성왕은 또 어떻게 해서 붙여졌을까?추모신화와 동명신화는 다르다고구려 건국신화를 「추모신화」라고 한다. 신화 내용을 보면 추모(주
[더뉴스=정재수 역사작가] 흔히 고구려를 떠올릴 때면 으레 고(高)씨의 고구려를 연상한다. 그러나 정작 고구려는 해(解)씨로 출발한 나라여서 고씨의 고구려가 적절한 판단인지는 다소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크다’, ‘높다’는 뜻의 ‘고(高=大)’와 ‘구려(句麗)’의 합성어로 이해한다. 성(城)은 고구려말로 ‘구루(溝漊)’, ‘홀(忽)’을 가리킨다. 또한 ‘홀’은 읍(邑), 동(洞), 곡(谷) 등을 나타내는 ‘고을’과도 통한다. 구려의 어원은 고을, 성과 연결된다. 따라서 고구려는 ‘큰 고을’, ‘높은 성’을
[더뉴스=정재수 역사작가] 고구려 시조의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삼국사기』 설명에 따르면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가리키는 부여의 속어이다. 현대 우리 속어에 ‘제비’가 있다. 여성을 잘 꼬시는 얍삽한 남성을 빗대어 이르는 비칭이다. 마찬가지로 주몽은 당시 부여 사회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모두 주몽이다. 『삼국사기』는 주몽의 또 다른 이름도 소개한다. ‘추모(鄒牟)’ 또는 ‘상해(象解)’이다. 둘 중의 하나가 실제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추모, 북방민족의 왕호 선우먼저 추모(鄒牟)이다. 《광개토왕릉비
[더뉴스=정재수 역사작가] 고구려 건국신화를 보면 졸본(卒本)국이 나온다. 졸본국은 북부여 제후국들 중의 하나로 북부여를 대표한다. 오늘날로 치자면 북부여는 대한민국이고 졸본국은 서울특별시에 해당한다. 다른 제후국들은 각 도와 같다.졸본국은 고구려의 모체이다.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국으로 내려와 당시 졸본국 왕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정략결혼을 성사시키며 고구려가 출발한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는 졸본이 아닌 홀본(忽本)으로 쓴다.홀본, 북부여 도성이 소재한 지역『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기록 모두가 졸본(卒本)으로 쓴다. 한
[더뉴스=정재수 역사작가]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처음 도읍으로 삼은 곳은 ‘홀본서성산(忽本西城山)’이다. 『삼국사기』가 말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이다. 우리는 중국 요녕성 환인(桓仁)의 오녀산성을 흘승골성으로 알고 있다. 또한 그렇게 믿는다.근거없는 오녀산성 비정오녀산성은 고려 때의 우라(오로)산성이다. 그런데 어떤 문헌에도 오녀산성이 옛날 고구려의 흘승골성이라는 기록이 아예 없다. 유감스럽게도 오녀산성을 고구려 최초 도읍으로 비정한 사람은 일제 식민사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