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리포트] 한국 현대사의 천적, 박정희와 김대중의 가상대화

'너 죽고 나 살자'는 의미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은 진정한 천적
박정희와 김대중의 '점선'으로 이뤄진 대화를 기록을 통해 '실선'으로 복원

  • Editor. 오태규 작가
  • 입력 2022.09.07 19:33
  • 수정 2022.09.17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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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 작가(전 오사카총영사, 전 한겨레신문사 논설위원실장)
오태규 작가(전 오사카총영사, 전 한겨레신문사 논설위원실장)

[더뉴스=오태규 작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 인물 중에서 천적(라이벌)을 꼽는다면 가장 먼저 이승만과 김구가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남과 북을 함께 사정권에 넣으면 박정희와 김일성이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남쪽의 정치인으로는 14대, 15대 대통령을 연달아 지낸 김영삼과 김대중을 빼놓을 수 없다. 김영삼이 '감과 행동력'의 정치인이었다면 김대중은 '지와 통찰력'의 정치인이었다. 김영삼-김대중 이른바 '양김'은 정치인생의 고비고비에서 경쟁과 협력을 하면서 현대 정치사에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래서 ‘양김’을 비교하는 글은 꽤 많은 편이다.​

‘양김’의 존재는 박정희라는 대항마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양김’의 진정한 천적은 박정희였다. 하지만 김영삼은 1990년 긴 야당생활을 접고 3당 합당을 통해 '박정희 진영'에 합류했다. 자연스럽게 김영삼이 박정희의 천적에서 탈락했고 김대중만 그의 유일한 천적으로 남게 됐다. 더구나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후보로 나서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이래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줄곧 그의 '제거 대상 1호'였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의미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은 진정한 천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질긴 인연치고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 1967년 치열했던 목포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된 뒤 1968년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하례식에서 5분 정도 의례적인 환담을 한 것이 유일하다. 그러나 둘은 박정희가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점점 강도를 더해가면서 대결하는 사이가 됐다.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항상 상대를 의식하며 치열하게 간접 대화를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점선'으로 이뤄진 대화를 두 사람이 남긴 기록을 통해 '실선'으로 복원한 가상 대화집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우리들의 자화상>(논형, 유상영 지음, 2022년 9월)이 나왔다. 박정희와 김대중 전문 연구자인 유상영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아니었으면 나오기 힘든 책이다. 유 교수는 포항제철의 성공 요인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이래 박정희 연구를 계속해왔고,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장을 지내며 김대중 관련 기록을 샅샅이 섭렵하며 김대중 연구를 해왔다.​

류상영 작가의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 논형 출
류상영 작가의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 논형 출

나는 이 책을 보는 순간, 일본에서 망명객으로 살다가 2021년 2월 숨진 정경모씨의 책 <찢겨진 산하>가 떠올랐다. 한국 근대사에서 세 명의 순교자인 여운형, 김구, 장준하가 저승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는 가상 정담 형식의 책인데, 정경모씨가 그들의 생전 언행과 저서를 참고해 해방 이후의 역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 교수의 책은 저자가 박정희와 김대중의 양자토론 사회를 보는 형식을 취한 점이 다르다. 하지만 두 책 모두 등장인물의 전모를 완벽하게 소화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내공 깊은 책이다. 대화 형식의 책이기 때문에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은 덤이다.​

이 책은 모두 3부와 에필로그1(청년과의 대화: 박정희와 김대중이 말하는 청년), 에필로그 2(박정희와 김대중 연보)로 구성돼 있다. 제1부(인간적 대화: 나는 누구인가)는 음식으로 치면, 전채(에피타이저)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과 어머니, 일제 식민지 등등 개인사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제2부(철학적 대화: 사회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제3부(역사적 대화: 박정희와 김대중이 얽혀 살아온 역사 현장들)가 주요리(메인)다. 2부에서는 역사, 경제성장, 민주주의, 지역감정과 색깔 논쟁, 외교전략, 민족과 민족주의, 민족분단과 통일에 관련한 두 사람의 인식과 관점, 생각을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를 통해 드러낸다. 전반적인 철학에서 박정희가 엘리트주의와 위로부터 강제 주입 방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데 비해, 김대중은 민중 중심의 사고와 과정 중심의 사고가 두드러진다. 또 유교문화와 한의 정서에 관해 박정희가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데 비해, 김대중은 그 속에서 긍정성과 발전 요소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외교전략에서는 박정희가 자주를 유난히 강조하고 김대중이 국제협력에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두는 점이 눈에 띈다.​

1부에서 사회자(저자)가 두 사람을 평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불이고 김대중 대통령은 물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고요. <중략> 앞으로 두 분의 대화에서 이 같은 기질의 차이가 역력히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2부와 3부는 그 예고대로 전개된다.​

3부는 두 사람이 서로 얽혔던 역사 현장을 중심으로 생각과 기질의 차이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전쟁,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 4.19와 5.16, 한일회담, 월남파병 등 초기 국면에서는 둘 사이의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욱 많아 보인다. "정치는 시궁창에서 피는 연꽃과 같은 것"이라는 김대중의 현실적인 정치관이 많이 작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대중은 장면 정부를 제외하고는 '총론 찬성-각론 반대 또는 보완'의 자세를 보인다. 그러나 박정희가 독재 권력을 강화해가면서 둘 사이의 간격은 점차 크게 벌어진다. 삼선개헌과 유신이 가장 대표적이다. 박정희는 가난 탈피와 북한과 대결에서 승리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김대중은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영구집권을 위한 욕심이라고 공박한다. 그 둘 사이에 최대의 인식 차이가 드러나는 곳이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이 책의 가장 미덕은 저자의 말대로 "독자들이 역사적 현장에 더 쉽고 의미 있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한 것이라고 본다. 또 각자 자기만의 얘기를 해온 두 사람을 가상 현실 속에서나마 대화하도록 함으로써 두 사람을 각기 지지하는 세력에게 이해와 화해, 공감의 기회를 제공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아쉬운 부분은 긴급조치,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박동선게이트, 부마항쟁 등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부분이 많이 누락된 점이다. 하지만 저자는 두 사람이 "주도적으로 얽혀 부딪히고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주고받은 말들이 있는 사건이나 현장만 다루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래도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그런 점을 보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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