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리포트] '더 크라운' 시리즈를 보며 '엘리자베스 2세 시대의 영국'을 여행하다

'위엄'의 왕실과 '효율'의 정부가 한 쌍을 이뤄 영국을 이끌어
강국의 지위와 자존심 유지는 왕실과 정부가 협력해 '영광스런 후퇴' 노선을 잘 이끌어왔기 때문

  • Editor. 오태규 작가
  • 입력 2022.09.17 19:44
  • 수정 2022.09.19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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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전 오사카 총영사
오태규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전 오사카 총영사

[더뉴스=오태규 작가] 영국의 국왕 엘리자베스 2세(1926년 4월 21일~2022년 9월 8일)가 숨졌다. 영국 역사상 가장 긴 70년 동안 왕 자리에 있었다. 9월 19일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열리는 장례식에는 영국 및 여왕의 위상을 반영하듯 세계 각국의 수많은 귀빈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영국 외교부가 많은 고위급 조문객으로 인한 공항 및 장례식장의 혼잡을 고려해, 각국에 전용기가 아닌 상업 비행기 이용과 2명 이내의 인원 제한을 요청할 정도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도 참석하기로 했으니 점잖은 척하며 표 안나게 차별하는 영국식 의전에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다.​

엘리자베스 2세가 숨진 뒤 넷플릭스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그의 재위 기간을 다룬 넷플릭스 원작 드라마 <더 크라운>을 발견했다. 2016년 말에 개봉된 시즌 1부터 2020년 11월 15일 시즌 4까지, 각 시즌 당 10편씩 모두 40편 짜리다. 1편 당 대략 1시간 분량이다.​

일본의 문호 오에 겐자부로는 유명인이 숨졌을 때 그가 쓴 저작을 모두 모아 읽는 것으로 추모를 한다는데, 나는 이 대하 드라마를 보면서 엘리자베스 2세의 생애를 더듬어보면 어떨까 하는 객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13일 저녁부터 보기 시작해 16일 낮까지 40편을 모두 몰아서 봤다. 이왕이면 장례식이 열리기 전에 다 보면 좋겠다는 욕심으로 다른 일을 제쳐놓고 몇 일 동안 꼬박 이 드라마에만 매달렸다. 나중에는 눈이 피곤한 나머지 촛점이 흐릿해질 정도가 됐다. 책을 보는 것보다 드라마를 보는 것이 시력의 소비가 훨씬 크다는 걸 절감했다.​

40편을 거의 연속 이어보기로 시청했더니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시즌 1과 시즌 2에 나왔던 배우들과 시즌 3과 시즌 4에 나오는 배우가 전면 교체되어 마치 딴 시리즈물을 보는 것처럼 어색했다. 인물의 성장과 함께 배우의 교체 필요성이 있겠지만, 특히 엘리자베스 2세와 마가렛 공주 역은 너무 인상이 다른 배우를 기용한 것 같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1, 2, 3 포스터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1, 2, 3 포스터

이 드라마는 조지 6세가 숨지고 그의 맏딸인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으로 등극하는 즈음부터 마가릿 새처 총리가 퇴임하는 1990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넷플릭스가 앞으로 시즌 5와 시즌 6을 출시한다고 예고했으니, 시대가 그로부터 10년에서 20년 더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시리즈 4까지는 왕 2명(조지 6세, 엘리자베스 2세)에 7명의 총리(클레멘트 에들리, 윈스틴 처질, 앤서니 이든, 헤럴드 맥밀런, 헤럴드 윌슨, 에드워드 히스, 마거릿 대처)가 등장한다.​

쉽게 말해, 이 드라마는 한때 세계 최강국의 지위에 있던 영국이 2차대전 이후 점차 쇠락해 가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영국의 지배층인 왕실과 정부가 정점에서 추락하는 나라를 어떻게 추스리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 드라마를 보면, '위엄'의 왕실과 '효율'의 정부가 한 쌍을 이뤄 영국을 끌고 간다. 왕실과 정부가 협력이 잘 되면 순탄하게 나라가 돌아가고, 협력이 무너지면 삐걱거린다. 역도 성립한다. 나라가 순탄하게 돌아가면 둘 간의 협력이 잘 이뤄지고 삐걱거리면 갈등이 생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표적인 갈등은 남아공의 아파르헤이트 정책에 관한 여왕과 새처 총리의 이견이다. 여왕은 영연방국가들의 의사를 존중해 남아공에 제재를 가하려고 하는 데 반해 현실주의자인 새처는 제재를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래서 나온 절묘한 해법이 '제재'라는 단어를 '신호(시그널)'라는 말로 바꾸는 타협이다.​

왕실은 헌법상으로는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고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보면 왕실은 '보이지 않는 손'을 활용해 개입한다. 그 장치가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왕과 총리의 비공식 만남이다. 이 만남에서 여왕은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정부도 이 만남을 통해 왕실을 견제한다. 처칠과 대처 ,윌슨과 같이 힘 세고 개성 강하고 소신파인 총리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약체 총리들은 대체로 여왕의 조언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왕실이 보수와 전통의 대표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어떤 때는 반동을 견제하는 중도 역할을 하기도 한다. 윌슨 총리 같은 노동당 총리의 정책에는 생리적으로 고개를 젓지만 대처 같이 무자비한 반 서민, 반 노동 정책에도 확실한 반감을 표시한다. 좌우 양쪽의 극단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꾀하는 능력 때문에 영국 왕실이 이태껏 수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과 같이 입헌 군주제를 취하고 있는 일본의 황실과 정부 관계는 어떤가 하는 궁금증도 일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일본의 황실과 정부가 영국의 '왕-총리 비공식 주례 만남'과 같은 시스템을 통해 의견을 조율하면서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영국은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왕실의 힘이 잔존해 있기 때문에 정부와 균형을 맞출 여력을 지니고 있지만, 허울뿐인 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격상된 일본의 황실은 애초부터 발광체의 노릇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오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왕실과 정부 관계뿐 아니라 왕실 내부의 갈등과 알력도 많이 나온다. 대부분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고 뉴스를 통해 알고 있는 추문도 많아 관음증을 자극한다. 엘리자베스 2세 동생인 마거릿 공주의 결혼과 파혼, 아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의 갈등이 대표적인 일화다. 대체로 위엄과 권위를 대표하는 왕실의 일원과 개인이라는 이중성에서 나오는 심적 갈등, 왕실 서열에서 오는 불만과 스트레스에서 나오는 일탈과 잡음들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 왕실 내부는 우리가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추하고 난잡하다. 다만, 그것을 잘 막고 관리하기 때문에 그나마 파장이 적은 것이다.​

한때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이 쇠락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강국의 지위와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왕실과 정부가 협력해 '영광스런 후퇴' 노선을 잘 이끌어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분명히 70년이라는 긴 재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닦고 갈아온 엘리자베스 2세의 노련하고 신중하고 균형된 사고와 처신이 큰 몫을 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엘리자베스 2세의 죽음 이후 영국이 불안해 보인다. 드라마에 나타났듯이 난봉꾼 이미지가 강하고 심리가 안정돼 있지 않은 찰스 새 국왕이 쉽게 엘리자베스 2세의 공백을 채우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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