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 우리들의 자화상’ 3

제3부 역사적 대화 – 박정희와 김대중이 얽혀 살아온 역사 현장들
김대중 “민주주의는 시간이 필요하다. 군대처럼 일사분란한 민주주의는 없다”

  • Editor. 김재봉 선임기자
  • 입력 2022.10.25 17:20
  • 수정 2022.10.2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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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뉴스=김재봉 선임기자]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국전쟁은 내전(內戰)의 성격도 가지고 있는 남북전쟁으로 한반도 최대 불행을 상징한다.

박정희는 1949년 12월 17일 ‘연말 종합 적정 판단서’를 통해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지적했다고 말한다.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거짓말, 부패한 국군 수뇌부의 안일한 태도에 대한 분노가 후일 5.16 군사쿠데타의 도화선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이와 동시에 박정희는 1952년의 자신과 최근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이 외쳤던 ‘아메리카 퍼스트’와 같았던 당시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이유로 들면서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필요성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한국전쟁을 통해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는 박정희의 인식과 달리 김대중은 한국전쟁이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키는 사건임을 직시하고 있다.

한편, 한국전쟁을 전후해 아이러니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극명하게 대조되는 입장과 위치다.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총책으로써 국군 내 공산주의자들을 침투시킨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사형 직전에 풀려난 이력이 있다. 반면 김대중은 한국전쟁 당시 업무차 서울을 방문했다가 북한군 치하에 인민재판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고, 우여곡절 끝에 목포 집에 도착했지만, 우익 반동분자로 몰려 죽음 직전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부산정치파동’이다. 박정희는 부산정치파동과 미국의 자국우선주의를 보며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는 계기 중 하나였다고 밝혔고, 김대중은 부산정치파동을 보면서 정계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5.16 군사쿠데타 이틀 뒤 5월 18일 전두환이 이끄는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의 지지 시가행진을 지켜보고 있는 박정희 <사진 논형 출판사>
5.16 군사쿠데타 이틀 뒤 5월 18일 전두환이 이끄는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의 지지 시가행진을 지켜보고 있는 박정희 <사진 논형 출판사>

■박정희, ‘이승만의 자유당과 윤보선의 민주당의 차이가 무엇인가?’

벅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바탕없는 봉건주의자고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이는 자유당의 정강정책에서 ‘농민과 노동자의 정당’을 표방한 것은 민주당이 ‘토착적인 지주토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민주당은 보수적이고 당파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정당’으로 인식했기에 자신의 5.16 군사쿠데타는 정당했다고 항변하고 있다.

당연히 김대중은 박정희의 이러한 생각에 정면 반대한다. 박정희의 이런 발언은 자신의 5.16 군사쿠데타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는 의도라고 판단한다.

■김대중, “민주주의는 시간이 필요하다. 군대처럼 일사분란한 민주주의는 없다”

“민주주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군대처럼 일사분란한 민주주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부족하더라도 국민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김대중의 말이다. 이 시대에 변함없이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다.

김대중은 5.16 군사쿠데타를 막 자라기 시작한 민주주의 싹을 군홧발로 짓밟은 것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비판했다. 또한 박정희가 군사쿠데타 이후 실시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도 민주당 정권에서 이미 만들어 놓은 정책임을 밝히고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 특히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발전은 박정희의 온전한 공로인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없었다면 민주당 정권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룩하지 못했을 무능한 정권이었는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

-한일회담의 배상금 문제도 민주당정권은 5차 회담에서 8억 5천만 불까지 배상받는 조건으로 거의 합의해둔 상태였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은 정치논리로 일본에 저자세 외교를 펼쳤고, 배상금은 5억 불로 줄어들었다-

김대중 도서관장 류상영 교수(연세대학교)의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 출 논형
김대중 도서관장 류상영 교수(연세대학교)의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 출 논형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 우리들의 자화상’ 제3부 ‘역사적 대화 – 박정희와 김대중이 얽혀 살아온 역사 현장들’은 ‘한국전쟁, 4.19혁명, 5.16, 한일회담, 월남파병, 경부고속도로, 삼선개헌, 1971년 대선, 전태일, 새마을운동, 7.4남북공동선언, 유신과 중화학공업화, 10.26’으로 이어진다.

김대중은 4.19혁명 이후 박정희에 의해 저질러진 5.16 군사쿠데타에 대응하는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의 무능력한 행동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집안 툇마루를 곡괭이로 파니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온 격”이라고 표현했다.

이어서 박정희와 김대중은 한일회담과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이어지면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박정희의 밀어붙이기와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인식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고, 김대중의 ‘민주주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부족하더라도 국민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민주주의다’란 말의 성격이 드러나고 있다.

-박정희식 ‘빨리빨리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정책 추진은 이후 군부정권이 끝나고 김영삼의 문민정부 이후부터 한국 사회 곳곳에서 후유증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이런 오류에 빠져있다. “박정희 시기에 경제성장에 성공했으니, 다른 모든 것을 정당한 것으로 평가해야 하며 다른 지도자였으면 경제성장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박정희 체제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엄청난 오판과 인식이다.

한국 사회에서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굶어 죽었을 것이다. 박정희 덕택에 우리가 선진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란 생각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 전체에 심각한 왜곡 현상을 불러오고 있다.

-지난 2008년 중국은 베이징 하계올림픽을 앞두고 공산당정권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 일괄적이고 반강제적인 베이징 도심 재정비 사업을 밀어붙였다. 박정희는 군사정권의 특징을 잘 활용해 경부고속도로 사업을 추진했다-

■삼선개헌,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니라고 변명하는 박정희

박정희는 1969년 삼선개헌 당시 시대적인 환경을 언급하면서 위급성을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삼선개헌이 “나는 지금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만심은 추호도 없습니다”라고 변명한다. 박정희는 삼선개헌의 필요성에 대해 60년대 후반에 모처럼 얻은 안정의 분위기를 70년대 초반까지 좀 더 굳건히 다져보자는 취지였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김대중의 반응은 “삼선개헌이 통과되는 날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란 조문을 장사지내는 날이다”라고 한탄했다.

제7대 대통령선거 당시 장충단공원에서 유세하고 있는 김대중 <사진 논형출판사>
제7대 대통령선거 당시 장충단공원에서 유세하고 있는 김대중 <사진 논형출판사>

■1971년 대선, ‘역사는 이미 정해진 인물의 등장만 유효한가?’

박정희는 1971년 대선 이후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 돌아선다. 박정희의 생각은 “이 시기에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는 꼭 필요하다”는 폐쇄적이고 결정론적인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마치 이건희와 이재용이 없으면 삼성전자가 망하고, 삼성전자가 망하면 대한민국 경제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보수성향의 서민들과 모피아(MOF, Ministry of Finance : 현 기획재정부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들과 같은 생각이다.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선거 패배는 “선거에서 진 것이 아니라, 개표에서 진 것이다”라고 말 했다.

대통령 직선제가 끝난 대한민국에서 박정희는 국가주도 경제성장 시스템에 더욱 매달린다. 전태일 분신 사건은 이러한 국가주도 경제발전 모델의 폐해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전국 방방곡곡을 개조하는 ‘새마을운동’ 역시 국가자본주의와 박정희식 군사정권의 밀어붙이기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1971년 대선에서 정적이었던 김대중의 정책노선을 차용한 7.4남북공동선언은 정권유지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는 결과물이다. 김대중은 7.4남북공동선언에 기본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지난 71년 대선에서 남북문제(미·일·중·소 4대국에 의한 한반도에서의 평화보장정책) 관련하여 박정희가 자신을 용공으로 몰아간 것에 대해 억울함도 호소했다.

김대중은 70년대 남북한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후 귀한 후 통화하고 있는 김대중 <사진 논형출판사>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후 귀한 후 통화하고 있는 김대중 <사진 논형출판사>

■박정희와 유신 -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발표된 ‘국민교육헌장’이다. 70년대 초등학교(현재 초등학교)를 다닌 모든 학생들은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해야 했다. 1972년 10월 17일에 발표된 유신헌법 체제하에서 김대중 납치사건, 중화학공업 육성 등이 진행됐다. 박정희는 유신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라고 말했다.

■“나는 괜찮아” - 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예측한 사실이 그대로 이루어지다.

박정희는 71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박빙의 승부를 펼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하고 일명 체육관 대통령으로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는 날까지 대한민국의 군부독재자로 18년간 통치했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오전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가는 동안 신나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던 박정희식 민주주의와 5.16 군사쿠데타를 위해 명분으로 주어졌던 국가주도 경제개발 모델은 박정희의 18년간 이어진 장기독재 하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수많은 신호(시그널)가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대중은 ‘뉴스위크’와 인터뷰에서 김재규를 의인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며 쿠데타나 암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10.26사건을 두고 김대중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렇게 충성스럽게 보이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피흘리는 박 대통령을 놔두고 화장실로 도망쳤고, 독재정권을 에워싸고 있던 사도들은 연기처럼 흩어졌지요. 그 당당했던 18년 5개월 10일의 철권통치는 신기루처럼 사라졌습니다. 독재정치는 이처럼 허망했습니다. 영화는 뜬 구름이요 권력은 물거품이었습니다”

1979년 10월 28일 김대중은 입장문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오판에 의한 도발을 우려하고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이는 71년 대선 당시 장충단공원 유세 후 박정희가 휴전선에서 북한의 동태를 살핀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김대중은 스스로 “자신과 박정희는 국가적으로 정말 복잡한 인연인 것 같다”고 말했다.

류상영 작가
류상영 작가

[작가 류상영 소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199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로 한국과 동아시아 정치경제와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학부에서부터 한국현대사에 관심이 많았고 역사적 사실과 정치경제적 이론을 접목하는 것을 연구의 본령으로 여겨 왔다. 포항제철 성공 요인에 관한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박태준 회장과 장시간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박정희 시대에 관한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관장으로서 전시실을 개관하고 사료를 발굴 보존하는 데 힘썼고, 이를 기초로 『김대중 연보 1924-2009』, 『김대중 저작목록집』, 『김대중전집 I』 등을 대표 집필하고 출간하였다. 아울러 40여 회에 걸친 인터뷰를 진행하여 〈김대중 구술사〉를 구축하였고 김대중에 관한 다수의 연구 결과를 출간하였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한 바 있고, 이후 일본의 게이오대학과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롬비아대학(UBC) 그리고 토론토대학(UofT)에서 방문 교수를 지낸 바 있다.

박정희와 김대중에 관한 그의 대표적인 연구로는,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전략 선택과 국제정치경제적 맥락”(한국정치학회보, 1996); “한국의 경제발전 궤적과 박정희모델”(선인, 2006); The Park Chung Hee Era(Harvard University Press, 2011, 공저); “1962년 박정희의 통화개혁과 한국의 민족주의”(현대정치연구, 2020); “Chaebol”(Oxford University Press, 2022); 『김대중과 한일관계』(연세대 출판문화원, 2012, 국·일문, 공저); 『김대중과 대중경제론』(연세대 출판문화원, 2013, 국·영문, 공저); 『김대중과 한국야당사』(연세대 출판문화원, 2013, 국·영문, 공저); “日韓關係50年: 金大中外交を再考する”(立敎大學, 2015); The Spirit of Korean Development(Yonsei University Press, 2015); “한국 민족주의의 두 가지 길: 박정희와 김대중의 연설문 텍스트 마이닝”(현대정치연구, 2021,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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