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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의 고구려 오디세이] 5. 추모신화가 동명신화를 차용한 이유북부여 계승을 천명한 고구려...추모신화와 동명신화는 다르다
정재수 역사작가

[더뉴스=정재수 역사작가] 시조 주몽을 『삼국사기』는 ‘동명성왕(東明聖王)’, 《광개토왕릉비》는 ‘추모왕(鄒牟王)’으로 쓴다. 동명성왕이 추모왕이다. 추모는 고구려 시조에게만 붙여진 특별 왕호이다. 흉노의 왕호 선우(單于)와 같으며, 둘 다 ‘천자(天子)’의 뜻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추모는 신(神)으로 여김이며 선우는 하늘(天)로 여김이다. 추모왕은 고구려 시조의 왕호가 이름으로 변화한 경우이다. 동명성왕은 또 어떻게 해서 붙여졌을까?

추모신화와 동명신화는 다르다

고구려 건국신화를 「추모신화」라고 한다. 신화 내용을 보면 추모(주몽)는 하늘의 기운을 받아 알에서 태어나며 가축우리의 돼지와 말이 어린 추모를 해치지 않고 보호한다. 또한 추모는 탈출하는 과정에서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넌다. 그런데 이 내용은 『후한서』〈동이열전〉 부여편에도 똑같이 나온다. 「동명신화」라고 한다. 다만 두 신화의 차이점은 두 사람 모두 강을 건너면서 추모는 강을 향해 황천의 아들이라 외치고 동명은 별다른 외침 없이 활을 강에 내리친다.

『후한서』 기록의 주인공은 고구려 추모가 아닌 북부여 동명왕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 「추모신화」가 북부여 「동명신화」를 차용한다.

동명왕은 북부여 5대 천제(天帝) 고두막(高豆莫)이다. 「동명신화」에 따르면 몽골 바이칼호 근처의 색리국(索離國-고리국) 출신인 고두막은 남쪽으로 내려와 북부여 동명왕이 된다. 그래서 몽골 왕호 ‘칸(汗)’을 붙여 고두막한으로도 쓴다.

▶ 색리국은 고리국(槀離國), 탁리국(橐離國)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前5세기~前2세기에 걸쳐 만주 송화강 북쪽에 존재한 나라로 이해하나, 몽골 바이칼호 근처의 코리(kohri)국으로 보기도 한다. 징기스칸의 후예인 부리야트(buriyats)족의 구전에 따르면 이 일대는 코리국 발원지로써 아주 옛날 부족의 한 일파가 동쪽으로 건너가 부여,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몽골비사』에는 징기스칸의 시조모인 알랑고아가 고구려 시조 고주몽(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딸로 나온다.

동명왕, 한의 현도군 축출한 영웅

그렇다면 고구려 건국신화는 무슨 연유로 「동명신화」를 차용한 걸까? 동명왕은 당대 최고의 영웅이다. 고두막은 前108년 홀본으로 내려와 북부여 천제에 즉위하며 스스로를 ‘동명’이라 칭한다.[五世檀君 高豆莫, 癸酉元年(前108년) 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 帝爲人豪俊 善用兵 嘗見北夫餘衰 漢寇熾盛 慨然有濟世之志 至是 卽位於卒本 自號東明 或云高列加之後也.-『북부여기』] 이어 동명왕(고두막)은 前86년 한(漢)의 현도군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옛 고조선(단군조선) 영토인 지금의 요하일대 동북평원을 모두 차지한다.

주몽이 홀본을 기반으로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前37년)의 동명왕은 이미 과거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당시 일대의 사람들에게 있어 동명왕의 존재는 여전히 살아있는 전설적 영웅이다. 당연히 「동명신화」는 고구려 건국의 명분과 북부여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소재이다. 그래서 고구려 건국신화는 「동명신화」를 차용한다.

고구려, 북부여 역사를 품다

1922년 중국 하남성 낙양 북망산에서 출토된 《천남산묘지명》은 동명과 주몽(추모)을 명확히 구분한다. ‘옛날에 동명은 하늘의 기운에 감응되어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광명으로 잉태되어 패수(浿水)에 임하여 도읍을 열었다.[昔者 東明感氣踰㴲川而啓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동명은 나라를 연 계국(啓國)자이고 주몽은 도읍을 연 개도(開都)자이다. 마찬가지로 《광개토왕릉비》도 추모(주몽)을 건국(建國)자로 쓰지 않는다. 창기(創基-창업 기초)를 닦았다고만 기록한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 천남산(泉南山)은 천(연)개소문의 셋째 아들이다. 묘지명의 글자크기는 1.5㎝이며 대략 1행 29자로 전체 28행이다. 천남산의 출신, 관직, 품계 및 당에 봉사한 행적 등을 담고 있다. 묘지명은 천남산의 아들 광부(光富)가 지었으며 글씨를 쓴 사람은 밝혀져 있지 않다.

▲ 《천남산묘지명》 동명과 주몽의 비교 기록 [필자 제공]

고구려 건국신화의 「동명신화」 차용은 단순히 북부여 계승차원을 넘어선다. 고구려는 잃어버린 북부여 180년 역사 전체를 가져간다. 『삼성기』(안함로 찬술)에는 북부여 건국시조 해모수를 고구려 태조로 받들어 제사지낸 기록도 있다. ‘계해년(前58년) 겨울 10월에 이르러 고추모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냈다. 처음 연호를 다물이라 정하니 이 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至癸亥冬十月 高鄒牟亦以天帝之子 繼北夫餘而興 復檀君舊章 祠解慕漱爲太祖 始建元爲多勿 是爲高句麗始祖也]’ 다시 말해 고구려의 출발은 주몽(추모)이 아닌 해모수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삼국사기』 보장왕(28대) 기록에는 고구려 역사기간이 700년이 아닌 900년으로 적고 있다. 『고구려비기』를 인용한 기록이다. 이는 고구려가 공식적으로 북부여 역사기간 180년을 포함한 사실을 증언한다.

▶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668년) 2월, …그리고 『고구려비기』에는 ‘9백년이 되기 전에 마땅히 80세 대장이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高)씨가 한(漢) 때 나라를 세워 지금 9백년이 되었고 이적(李勣)의 나이가 80입니다.[…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 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

『북부여기』(범장 찬술)에 따르면 前239년 해모수에 의해 건국된 북부여는 6대를 이어오며 前58년 고무서(高無胥)에 이르러 고구려에 흡수된다. 북부여의 역사기간은 180년이다. 『태백일사』(이맥 찬술) 〈고구려국본기〉에는 추모왕의 계보가 자세히 나온다. 아버지는 옥저후(沃沮后) 불리지(弗離支)이며 불리지의 조부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高辰)이다. 추모왕은 해모수의 고손자이다.

▲ 북부여 왕통과 추모왕 [필자 제공]

고구려 건국신화에는 우리 역사에서 잘려나간 북부여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재수 역사작가  thenews749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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