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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의 고구려 오디세이] 6. 추모왕, 북부여 제후국 병합병합의 원동력은 추모왕의 혈통이 주효
정재수 역사작가

[더뉴스=정재수 역사작가] 어느 나라든지 건국초기 최대 목표는 영토 확장이다. 일정한 땅을 확보하지 않으면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영토 확장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군사적 정복활동을 동반하는 하드(hard)적 방법이며, 또 하나는 혼인 등을 통해 결합하는 소프트(soft)적 방법이다. 고구려는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여 영토 확장을 꾀한다. 소프트적 방법의 대표적인 경우는 홀본국 출신의 소서노와의 혼인이다. 추모왕은 소서노와의 혼인을 통해 홀본국을 모체로 고구려를 건국한다.

당시 대륙 동북방은 북부여가 와해되며 연맹체를 구성하는 여러 나라가 하나 둘 독자노선을 취하며 난립하는 소위 열국(列國)시대이다. 『삼국사기』 시조 추모왕(동명성왕) 편에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등 3개 열국이 나온다. 그런데 이들 열국은 추모왕이 직접 군사를 보내 정벌한다.

비류국, 단군조선 계승의 혈통문제

첫째는 비류국(沸流國)이다. 고구려 북동쪽에 인접한 지금의 요녕성 흑산현 동북쪽지역에 소재한다. 당시 왕은 송양(松讓)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추모왕은 고구려 건국 직후 송양왕을 찾아간다. 송양왕은 일찍이 ‘군자(君子)’를 만난 적이 없다며 추모왕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에 추모왕은 천제(天帝-북부여 왕호)의 아들임을 밝히고 비류국이 고구려의 속국이 될 것을 요구한다. 결국 두 사람은 활쏘기로 승부를 가린다.

추모왕은 前38년(추모2)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해오자 그 땅을 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군주에 봉한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기에 이름으로 삼는다.[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故以名焉]’

『고구려사략』은 ‘다물은 고향의 뜻으로 해모수의 땅이다.[多勿故鄕之意 解慕漱之地也]’라고 설명한다. 비류국은 옛 북부여 땅이다. 『유기추모경』 기록을 보면 추모왕은 비류국을 정벌하고 그 땅을 탕동(湯東), 탕서(湯西), 탕북(湯北) 등 3군으로 나누며 송양왕을 다물후에 봉한다. 또한 북부여의 건국시조 해모수 천제의 압록행궁이 탕동 땅에 있어서 추모왕이 북부여 옛 땅의 일부(비류국)를 되찾은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송양왕이 처음 언급한 군자(君子)의 실체이다. 일반적으로 군자는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의 군자는 ‘단군의 아들(자손)’을 지칭한다. 『고구려사략』은 이때 송양왕이 망령되게도 선족(仙族-선인왕검의 후손)을 칭했다[妄稱仙族]고 기록한다. 다시 말해 추모왕은 비류국 송양왕과 단군조선(고조선) 계승의 혈통문제를 놓고 다툰다.

행인국, 북부여 계승의 정통성 문제

둘째는 행인국(荇人國)이다. 추모왕은 前32년(추모6) 오이와 부분노를 보내 행인국을 정벌한다. 행인국은 고구려의 북서쪽인 지금의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赤峰)을 포함하는 노로아호산(奴魯兒虎山) 주변일대에 소재한다. 노로아호산은 ‘어리석은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 산’의 뜻이다. 이는 단군왕검의 탄생신화에 등장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를 연상시킨다. 이 일대는 우리 민족의 시원지이다. 특히 적봉지역은 요하문명의 상징인 「홍산문화」가 꽃핀 곳이다.

『유기추모경』에 당시의 행인국 왕의 이름이 나온다. 해존(解存)과 해문(解文)이다. 둘 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와 성씨가 같다. 또한 왕호는 ‘천제(天帝)’를 쓴다. 행인국은 고구려가 건국되기 이전에 해모수의 직계후손이 세운 나라이다.

뒤늦게 북부여 계승을 기치로 건국한 추모왕의 고구려로서는 행인국 존재 자체가 부담일 수밖에 없다.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있을 수 없는 이치다. 결국 추모왕의 행인국 정벌은 북부여 계승의 정통성을 재확립하는 과정에서 흡수한다.

북옥저, 말갈(북갈)집단의 제압

셋째 북옥저(北沃沮)이다. 추모왕은 前28년(추모10)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벌한다. 북옥저는 지금의 요녕성 심양(瀋陽) 일대에 소재한다. 다만 당시 북옥저가 국가체제를 갖춘 집단인지는 확실치 않다. 추모왕은 동부여(길림성 길림)를 탈출하여 홀본국으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말갈을 만난다. 북옥저는 말갈집단과 관계가 깊다.

『삼국사기』 기록외의 제후국

그렇다면 제후국은 앞의 3개 소국 말고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 『고구려사략』에는 개마국, 구다국, 낙랑국, 비리국, 섭라국, 순노국, 자몽국, 환나국, 황룡국 등이 줄줄이 나온다. 모두 고구려(홀본국)를 중심으로 한 주변 소국이다. 

고구려와 북부여 제후국 분포 [필자 제공]

추모왕은 이들과 혼인 또는 교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영토를 넓힌다. 이들 열국은 대부분 추모왕시기에 병합되나 일부는 계속해서 독립 체제를 유지하며 대무신왕(3대) 때에 이르러 개마국과 구다국을 마지막으로 모두 고구려에 흡수된다.

이 중 낙랑국은 남옥저 땅인 지금의 요하 동쪽 요녕성 요양(遼陽)일대에 소재한다. 요양은 『삼국사기』가 ‘선인왕검이 살던 집[仙人王儉之宅]’으로 소개한 옛 고조선의 수도 평양(왕검성)이며 훗날 동천왕(11대)이 천도한 평양성이다. 당시 낙랑국 왕은 시길(柴吉)이다. 참고로 시길의 낙랑국은 대무신왕(3대) 때인 32년(대무신15)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의 배경이 되는 최리(崔理)의 낙랑국이다. 『고구려사략』은 이때에 이르러 낙랑국이 ‘시길로부터 4대 80여년 만에 나라의 문을 닫았다.[樂浪自柴吉 四世八十餘年 而國除]’고 소개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시기 소국 중 일부는 한반도로 이동하여 새로운 거점을 마련한 다. 추모왕의 병합에 반발한 일종의 후국(後國)이 한반도내에 자리잡는다. 북쪽지방인 평북지역의 황룡국, 함북지역(개마고원 개마국에서 유래)의 개마국, 함남지역(백두산 남쪽)의 행인국, 동해 북동쪽 연안(함흥 지역)의 동옥저 등이다. 또한 서남지방에는 전북지역의 비리국 이 있다.

결과적으로 추모왕의 초기 고구려가 비교적 손쉽게 영토를 확장하며 급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주변 소국이 모두 북부여 제후국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들 소국은 북부여 계승을 천명한 신생국 고구려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물론 고구려가 강력한 구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추모왕의 혈통이 절대적인 배경이다.

『고구려사략』 추모왕 사론(史論). ‘논하길 동명(東明)은 세상에 다시없는 뛰어난 왕이었다. 나이 40세 이전에 동토(東土)를 석권하여 7백년의 기초를 열었으니 가히 성인이라 할 만하다. 후세의 아골타(阿骨打-금태조 완안아골타)나 홀필열(忽必烈-원세조 쿠빌라이)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었다. 다만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미개척지가 남아 있었다. 처음에 후비(后妃) 제도가 맑지 않아 후세까지 폐단을 끼쳤고 나라를 창업하는 것이 급하였기에 자신의 수명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도다.’

초기 고구려의 북부여 제후국 병합은 추모왕의 혈통이 주효하다.  

정재수 역사작가  thenews749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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