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수의 고구려 오디세이] 10. 고구려 개국공신 협보의 행방

일본열도 다파나국의 시조가 된 협보

  • Editor. THE NEWS
  • 입력 2024.01.02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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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뉴스=THE NEWS ] 고구려 개국공신은 7명이다. 오미, 마려, 협보, 부분노 등 4명은 추모왕이 동부여를 탈출할 때 처음부터 동행하며, 재사, 무골, 묵거 등 3명은 중간에 합류한다. 특히 『고구려사략』은 이들을 ‘四豪三賢’ 즉 ‘4명의 호걸과 3명의 현자’로 표기한다.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인물들이다.

고구려에서 쫓겨난 협보

▲ 정재수 역사작가
▲ 정재수 역사작가

‘四豪’의 한 사람인 협보(陜父)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협보는 유리왕에게 직언을 했다가 파면되어 고구려에서 쫓겨난다. 때는 국내 위나암성으로 천도한 직후인 3년(유리22)이다. 유리왕이 도성을 비우고 사냥에 몰두하자 협보는 유리왕에게 직언을 한다. 이에 유리왕은 협보를 처음 만나면서부터 마음속에 쌓인 것이 있었던 터라 이를 명분삼아 협보의 대보(大輔-국무총리) 관직을 파면한다. 한마디로 유리왕은 협보가 자신을 어린애 취급했다는 괘심죄를 적용한다. 『삼국사기』는 협보가 유리왕의 처분에 분개하여 남한(南韓)으로 갔다고 한다.[陜父憤去之南韓] 이에 반해 『고구려사략』은 협보가 조그만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갔다고 기록한다[陜父以瓢浮海入新羅]. 『삼국사기』의 남한이 바로 『고구려사략』의 신라이다.

일본열도 다파나국의 시조

그런데 『태백일사』에는 협보의 행적을 다르게 소개한다. 협보는 신라로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에 도착하여 다파나국(多婆那國)을 건국한다. 협보는 다파나국의 건국시조다. 다파나국은 고대 일본의 소국으로 지금의 혼슈섬 교토(京都)부와 효고(兵庫)현, 오사카(大阪)부 일부에 소재한다.

또한 다파나국은 신라 석씨왕조 시조 석탈해의 출신지로 기록된 나라이다. 무슨 이유일까? 사실 협보와 석탈해는 혈연관계이다. 협보의 처는 낙랑왕 시길(柴吉)의 딸 시화(柴花)이며, 시화의 언니 시작(柴鵲)은 추모왕의 후궁으로 작(鵲)태자를 낳는다. 작태자가 바로 석탈해이다. 석탈해는 협보의 처조카이다. 석탈해는 4년(유리23) 이모부 협보를 뒤쫓아 일본열도(다파나)로 건너갔다가 이후 경주로 들어와 신라 석씨왕조 시조가 된다.

▲ 협보와 석탈해 관계도 [필자 제공]
▲ 협보와 석탈해 관계도 [필자 제공]

협보, 백인 계통의 혈통

『유기추모경』에 협보의 어머니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그 어미 재찬아(再贊兒)는 황두(黃頭)에 하얀 피부이다.[其母再贊兒 黃頭而雪膚]’ 협보의 어머니는 노랑머리 백인여성이다. 러시아계 백인인 코카서스(Caucasus) 인종이다. 당연히 협보도 백인혈통이다.

☞ 신라 박씨왕조 일성왕(7대)과 아달라왕(8대)는 부자지간으로 용모가 특이하다. 일성왕은 백옥처럼 하얀 피부이며, 아달라왕은 얼굴 생김이 기이할 정도로 코가 오뚝하다. 전형적인 백인의 모습이다. 두 왕에게 백인형질을 물려 준 사람은 협보의 증손녀 이리생(伊利生)이다.

협보는 전화위복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공식적으로 신라왕실에 백인형질을 제공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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