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수의 고구려 오디세이] 8. 고명세자가 된 유리왕

백제 건국을 촉발시킨 단초 제공

  • Editor. 정재수 역사작가
  • 입력 2023.06.09 19:14
  • 수정 2023.06.09 19: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재수 역사작가
정재수 역사작가

[더뉴스=정재수 역사작가] 유리왕(2대)의 대표 상품은 ‘황조가(黃鳥歌)’이다. ‘훨훨 나는 저 꾀꼬리(翩翩黃鳥) 암수 서로 정답구나(雌雄相依) 외로워라 이 내 몸은(念我之獨) 뉘와 함께 돌아갈꼬(誰其與歸)’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인 황조가는 화희(禾姬-골천출신)와 치희(雉姬-한족출신) 두 후궁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유리왕의 애달픈 심정이 잘 녹아있다.

▶황조가는 고구려 초기 정치세력간의 권력충돌을 배경으로 한다. 화희(골천 출신)와 치희(한족 출신)의 다툼은 토착세력과 외래세력간의 권력싸움이다. 황조가는 왕권을 강화시키려다 좌절한 유리왕의 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서정시이다.

《광개토왕릉비》의 고명세자 유리왕

『삼국사기』를 보면 유리왕의 즉위전 기록이 유난히 많다. 유리왕은 시조 추모왕의 맏아들이며 전처 예(禮)씨 부인의 소생이라는 사실,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증표(證票-부러진 칼)를 남겨 유리왕이 이를 가지고 고구려로 추모왕을 찾아온 점 그리고 태자에 봉해져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한 내용 등이다.

통상적으로 『삼국사기』는 왕의 즉위전 기록을 간략히 서술한다. 왕의 이름은 무엇이며 누구의 몇 째 아들이고 성품은 어떠하다는 식이다. 그런데 유리왕의 경우는 시조 추모왕의 즉위전 기록인 건국신화 못지않게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적고 있다. 매우 이례적이다.

광개토왕릉비
광개토왕릉비

이는 유리왕의 왕위승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특히 《광개토왕릉비》는 유리왕(유류왕)을 ‘고명세자(顧命世子)’로 기록한다. 고명은 왕이 임종 직전에 신하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남기는 말이다. 유명(遺命), 유훈(遺訓)이라고도 한다. 고명세자는 유훈으로 지명된 후계자를 말한다. 다시 말해 유리왕은 추모왕이 죽기직전까지 공식적으로 태자에 책봉되지 못한다.

당시 태자는 유리가 아닌 비류이다.[召西奴立朱蒙爲王 而沸流爲太子 溫祚爲王子-『백제서기』] 추모왕은 홀본국 왕녀 소서노와 정략결혼을 통해 고구려를 건국한다. 소서노의 홀본국이 고구려의 모체이다. 비류(소서노 前남편 우태 아들)의 태자 책봉은 추모왕이 소서노와 고구려 건국을 놓고 벌인 일종의 딜(deal)이다. 그런데 추모왕의 직계혈통인 유리가 고구려를 찾아오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추모왕은 비류를 제쳐놓고 유리를 후계자로 삼기 원한다. 『삼국사기』는 추모왕이 사망하기 6개월 전에 유리를 태자에 책봉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고구려사략』은 유리의 태자 책봉에 반발한 소서노가 크게 화를 내고 본거지인 우양(牛壤)으로 가버려 추모왕이 이를 근심하여 병을 얻었다고 전한다 [上與禮氏類利謁神隧 會群臣議正胤 皇后大努與仇都仇賁等退居牛壤 上憂恨添病秘之]. 결국 유리의 태자 책봉은 소서노의 승인을 받지 못하여 미완으로 끝난다. 그래서 유리왕은 《광개토왕릉비》의 고명세자가 된다.

고구려 3분할 통치와 소서노의 한반도 남하

추모왕 사후 태자 비류는 고구려왕이 되지 못한다. 대신 추모왕의 의지대로 유리가 후계자 고명을 받아 前19년 왕위를 잇는다. 다만 『고구려사략』은 유리왕이 소서노를 위로하기 위해 재위3년(前17년)에 비류,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3분할 통치한 사실을 전한다. 유리왕은 소서노와 함께 수도 흘승골성을 중심으로 소노부, 황룡국, 행인국, 구다국, 비리국 등을 담당하고, 엄표왕(淹淲王)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을 도읍으로 순노부, 절노부를 담당하며, 한남왕(汗南王) 온조는 우양(牛壤)을 도읍으로 관노부, 계루부를 담당한다 [三年甲辰 正月 以順奴郣奴爲沸流治 都彌鄒忽 以灌奴桂婁爲溫祚治都牛壤 涓奴黃龍荇茶卑離 上與召皇后治之 以慰召后之心]’.

▶비류의 미추홀은 지금의 요녕성 철령(鐵嶺) 은주구(銀州區)이다. 미추(彌鄒)는 ‘간난아이 추모왕’을 이르는 말로 유화부인이 자칭 해모수를 만나 추모왕을 임신한 장소인 합환(合歡)을 가리킨다. 비류는 한반도로 남하할 때 미추홀 지명을 함께 가져온다. 한반도 미추홀은 지금의 충남 아산 인주면 밀두리(密頭里)이다.

유리왕의 고구려 3분할 통치  -사진 필자제공-
유리왕의 고구려 3분할 통치 -사진 필자제공-

그러나 유리왕의 3분할 통치체제는 오래가지 못하고 갑자기 중단된다. 소서노가 고구려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유는 소서노의 홀본계가 유리왕의 동부여계에게 밀려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서노는 고구려에서의 꿈과 삶을 모두 포기한다. 그리고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한반도로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다.

《광개토왕릉비》의 ‘고명세자유류왕[顧命世子儒留王]’ 일곱 글자에는 백제 건국을 촉발시킨 비밀이 오롯이 담겨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THE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24 THE NEWS.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
모바일버전